수습위원 윤예진


고등학생 이전까지 내가 찾아봤던 기사는 오로지 연예 분야의 기사뿐이었다. 부끄럽지만, 경제라던가 사회 분야에는 관심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분더러,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경제는 알 수 없는 용어들에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고, 사회면의 기사는 내 얘기가 아닌 것만 같아서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경제나 사회나 관련된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 뒤로는 쉽다. 그들만의 문제이니, 그들이 해결해야 하고, 그들이 해결할 것이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그 문제와 나를 독립시키고 멀리서 문제를 바라만 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쉽게만 생각했고, 굳이 내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게 된 것은 SNS 속 글들 때문이었다. ‘연대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회 속에서 ‘혐오’로 인해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혐오에 맞서기 위해 혹은 이를 알리기 위해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SNS를 통해 사람들은 그들과 연대한다는 의사를 표하는 해시태그 혹은 글을 게시했다. 물론, 그 문제들은 꽤 오래전부터 문제 삼아진 것들이었고, 이를 해결하거나 알리기 위해 나선 이들 또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내가 무관심했을 뿐이었다.

처음 연대한다는 글을 보았을 때, 연대라는 단어가 새롭고 어렵게 다가왔다. 도대체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연대한다는 그 마음 하나로도 충분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연대한다는 해시태그와 글들을 볼 때마다 나만 연대에 대해 모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연대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누군가에게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조금은 부끄러웠고,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연대한다는 것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진다는 뜻을 가진다. 연대한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를 알게 되자 더욱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려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공감해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당시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회적 문제들은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의 인권과 그들에 대한 혐오문제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존재가 있고, 그 존재들의 수만큼 다양한 삶과 경험이 있다. 나는 그 존재들의 삶과 경험을 모두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문에, 그 존재들이 겪는 고통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고, 만에 하나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겪는 고통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일 것이다. 또, 어떤 부분들에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연대한다고 말하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 책임을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살면서 연대책임에 대한 압박을 느껴본 사람은 안다. 나의 실수가 나의 한 마디가 내가 속해있는 집단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내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과 연대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행여나 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 서툰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처럼 서툰 연대의 표시가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고민과 걱정이 커질 즈음에 연대에 관한 생각이 변하고, 연대해야겠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출판사 민음사에서 발행되는 <릿터>라는 격월간지 속 산문을 통해서였다. 해당 격월간지의 19호 속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혼돈’이라는 제목의 산문은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글쓴이의 경험을 나타내며 다양한 혐오와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중, 연대에 대한 내 생각을 흔들어 놓은 것은 단 몇 문장이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던 산문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마주쳤고, 그 문장을 자주 들여다봤다. 내가 이제껏 해왔던 생각을 모두 뒤집었던 문장이었기에 충격이 컸고, 그만큼 소중했다. 그리고 몇 문장 되지 않는 속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은 매번 달라졌다. 너무 많이 찾아봐서 외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외운 문장들이었다.


‘연대’는 타인을 이해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상관없이

그들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타인의 존재를,

그이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부정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타인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탓해야 할 것은 타인이 지닌 낯선 특징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