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최세영
2020년 상반기를 흔들어놓은 사회이슈를 꼽아본다면 단연 ‘n번방’ 사건과 ‘코로나1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 이 천사와 악마의 간극에서 놓치고 있는 본질이 있다면, 바로 인간이다.
(자칭) “악마”가 되고 싶었던 ‘박사’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사건’(이하 n번방)의 주범으로 검거된 닉네임 ‘박사’ 조주빈이 검찰에 송치되며 기자들 앞에서 남긴 말이다. 위 발언은 큰 비난과 야유를 받으며 가수 김윤아 씨가 남긴 트윗(“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쥐어주지 마십시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조주빈의 신상공개 직후 다수의 언론이 조주빈의 우수한 대학 성적, 학보사 기자 경력, 독후감 대회 수상 이력 등 그야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을 남발했다. 다행스럽게도 한편으로는 언론의 보도윤리적 차원에서 이와 같은 실태가 지적받기도 했다. 전국언론노조는 긴급지침을 통해 범죄자에 대한 ‘짐승’, ‘늑대’, ‘악마’ 등의 지칭이 “가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가해자를 비정상적 존재로 타자화해 예외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한다”고 지적하며 위와 같은 표현을 지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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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일보(고영권 기자).
범인(犯人)이 된 범인(凡人)
‘악마’와 인간 조주빈의 간극은 얼핏 넓어 보인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욱 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마는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피해자들을 ‘노예’로 부리며 성 착취 범죄를 일삼고 자신만의 왕국의 ‘왕’처럼 군림했던 조주빈에게 ‘악마’란 단어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범인(凡人)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전략적인 지칭일 뿐이다. 그러나 조주빈, 그 역시 악마가 아닌 그저 범인에 불과하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지적했다. 나치의 관료로써 유대인 학살을 이끌었던 아이히만이 특별히 사악한 본성을 가진 악한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만을 따를 뿐이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례를 통해서다. 핵심은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에 있다. 아렌트는 (어리석음이 아닌)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일인지 아닌지 사유하지 않는 것에 죄가 있다고 말한다.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집단의 규칙에 무비판적으로 마비돼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을 때 악은 곧 '평범한 일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사유하지 않으므로 반성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죄를 마치 “부캐(부(副)캐릭터)”처럼 스스로 만든 악마라는 허상에 전가하는 것이다.
지워지는 피해자들.
결국 이런 ‘악마 놀이’에 지워지는 것은 피해자들 뿐이다. 일부 언론이 n번방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일부 네티즌들이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의 댓글을 다는 등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n번방 사건이 최초 보도된 이후 오히려 텔레그램 내 n번방 이용자 유입이 늘어난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의 피해는 넓어지는데, 피해자 보호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겨레는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 행태를 꼬집었으나, 비단 경찰 등 수사기관의 책임만은 아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N번방 피해자들을 보호해주세요’라는 청원 글의 동의자 수가
n번방 운영자나 가입자의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청원 글 동의자 수의 약 1/20에 불과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해자의 ‘악마 놀이’에 놀아나는 동안 정작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피해자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백의의 천사 #덕분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창궐하며 이에 헌신하는 의료진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는 캠페인 ‘덕분에 챌린지’가 유행하였다. 덕분에 챌린지란 보건복지부와 중앙대책안전본부가 주도한 코로나19 의료진 응원 캠페인으로, 엄지를 위로 치켜들어 ‘존경’과 ‘자부심’을 뜻하는 수어 동작 사진을 SNS에 ‘#덕분에챌린지’, ‘#덕분에캠페인’, ‘#의료진덕분에’ 해시태그를 달아 게시한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해당 캠페인은 7월 기준으로 약 4만3천 건의 해시태그 수를 기록하는 등 높은 참여율을 보이며 확산되었다. 코로나19라는 난세에서 꽃핀 ‘의료 영웅’에게 감사를 전하는 풍경, 아름답다. 그러나 영웅화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현실은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다.